<고조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건국하였다고 전해지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단국왕검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여지승람]등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경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고, 왕 아래에는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농경 사회, 신분제 사회, 노동력과 사유 재산 중시 등)를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서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왕검성을 옴겼다.
기원전 194년 중국 진-한 교체기에 위만과 유이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하였고,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가 위만 조선이다.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고, 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부의 진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독점했다. 또한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우거왕 때 중국의 한 무제의 고조선 침입으로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부여>
부여는 만주 쑹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성장하였다.
여러 부족의 연맹으로 국가가 형성되어서 왕권이 미약했다.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거, 구가 등의 대가가 존재하였고, 대가들은 저마다 독립된 행정 구역 기능을 한 사출도를 다스렸다.
대가들이 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흉년 시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고, 국가 중요 정책은 대가들이 모여 결정한것으로 보았을때 왕권이 아주 미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는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주옥-모피 등이 유명하다.
또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함께 생활하는 형사취수혼제가 있었고,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부여에는 1책 12법이 있었는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 지방에서 성장하였고, 계루부 출신 고씨가 왕위를 계승한 연명 국가이다.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존재하였고,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대가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귀족 회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를 만들어 곡식을 저장하였고, 부여와 마찬가지로 1책12법과 형사취수혼이 있었다.
제천행사로는 10월에 동맹을 개최했다. 또한 남자가 혼인하여 신부 집 뒤편에 작은 별채(서옥)를 지어 생활하다가 자식이 자라면 처자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
<옥저와 동예>
옥저와 동예는 공통적으로 왕이 아닌 군장 국가로써 읍군, 삼로 등의 군장이 통치하였다.
고구려의 압박과 동해안에 치우친 지리적 여건 등을 이유로 선진 문물 수용에 불리하여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옥저와 동예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고, 고구려의 공납을 바쳤다. 동예는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옥저는 민며느리제 와 가족 공동 무덤이라는 풍속이 있었고
동예는 족외혼과 책화라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삼한>
삼한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 진이 성장하여 마한, 진한, 변한으로 성립되었다.
마한의 소국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했다.
정치적으로는 신지-읍차 등의 군장이 각 소국을 다스렸고, 제사장인 천군이 신성 지역인 소도를 다스렸다.
또한 변한 지역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을 낙랑-왜(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
풍속으로는 씨를 뿌리는 5월과 추수하는 10월에 계절제를 개최했다.